지난주 오래 기다리던 책을 하나 받았습니다. ‘오래 기다리던’이라고 하기엔 좀 멋쩍긴 해요. 펀딩만 하고 한참 동안 잊고 있었거든요. 만화가 오카자키 교코(岡崎 京子)의 유일한 이야기집, ‘우리는 모두 잊어버리네’입니다.저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작가고, 국내에서는 ‘쪽프레스’에서 그녀의 작품을 다수 발간했습니다. 아마 '언리미티드에디션' 같은 곳에 가서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일러스트 표지가 있다면 그게 바로 오카자키 교코의 작품들일 거예요. 저도 눈에 띌 때마다 한두 권씩 사 모으다 보니 국내에 발간작은 꽤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는 사실 쉽거나 편하진 않습니다. 일종의 ‘치유계’ 만화들을 떠올리신다면, 아마 그 정반대에 있는 작품들일 거예요. 다루고 있는 소재도 대부분 우리가 삶에서 가장 깊이 통증을 느끼는 부분이나 애써 외면해 버리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그걸 아주 거침없고 뾰족하게 다루고요. 연출도 친절하진 않아요. 세련과 추상 사이를 마구 오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아플 걸 알면서도 자꾸 긁어 영원히 남을 흉을 만드는 상처 같은, 그런 작품들입니다. 이야기집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어요. 오래 기다린 걸 생각하면 좀 게으르죠. 얼른 읽어 보고, 또 친구들과 감상을 나눠보고 싶네요.
펀딩한 사람 목록에서 저에게 오카자키 교코를 알려준 친구들의 이름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언제든 기다릴 가치가 있는 작품이, 작가가, 사람이 된다는 거. 되게 귀하고 기분 좋은 일일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 레터도 매주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기쁜 마음으로, 이번 주 레터도 시작해 볼게요.
사람12사람 [구름] (2026.01.13)
‘이게 누군가’ 몇 번이나 눈을 비볐습니다. 그 이름이 맞습니다. 2018년 EP [빗물구름태풍태양]으로 장르 음악 마니아들에게 호평받았던 바로 그 이름이요. 프로듀서 은천과 보컬 지음의 듀오 구성에서 2022년 지음의 솔로로 팀 구성을 바꾸고 싱글 하나와 몇몇 프로젝트에서만 간간이 이름을 보였던 이름의 본격 귀환입니다. 1인 체제로 팀을 정비했다는 사실부터 어느 정도 음악 색깔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그래도 투명도 70%로 차갑게 울리는 지음의 목소리를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충분히 마음이 기울여질 트랙입니다. 음악의 무드를 더해주는 오피셜 비주얼라이저도 함께 감상해 보세요.
이제 막 데뷔 EP를 낸 가수를 두고 이미 작년에 공개된 믹스테이프를 소개하는 게 맞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고, 이 앨범을 들으면 이들의 데뷔앨범 [SHOT CALLERS]에 좀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추천해 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의 뿌리는 ‘사람들이 이 음악을 어떻게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까’니까요. [SHOT CALLERS]이 1월 13일에 나왔고, 믹스테이프가 1월 16일에 나왔으니, 소속사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믹스테이프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냄새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신인 보이 그룹 롱샷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줍니다. 특히 ‘감성’ 영역에서요. 소속사 대표 박재범(Jay Park)의 필터를 거쳐 뽑은 원타임(1tym) 같은 느낌이 싫지 않습니다. 싫을 리가 없죠. 유튜브에 믹스테이프와 함께 공개했던 메이킹 영상 ‘4SHOBOIZ Scenedump’도 권해 봅니다. 영상 내용에서 화질까지, 이들이 어디의 무엇을 타겟으로 하는지 좀 더 명확해질 거예요.
놀이도감 [Hazard Course (feat. mei ehara)] (2026.01.15)
놀이도감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노래를 만드는 김춘추가 절로 연상됩니다. 본체인 실리카겔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모습이죠. 기계식의 커다란 몸체 안에서 김춘추는 대부분 기타리스트이자 사운드 메이커라는 확고한 역할로 존재하니까요. 장르보다는 감각의 영역에서 정의하는 게 훨씬 쉬운 그의 음악에, 이번에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mei ehara가 함께 했습니다. 작년 ‘아시안 팝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나 협업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같은 자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정말 빨리 알아보나 봐요. 놀이도감 특유의 빈티지한 연주로 시작해 우주로 날아가 버리는 엔딩까지, 느긋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세계가 여전히 펼쳐집니다. 곡 소개에 쓰여 있는 ‘역시, 그냥 내가 하고 싶던 대로 할 걸…’은 그렇게 할 걸 그랬다는 후회일까요, 그렇게 했다는 안도일까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