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건 시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론 돈이 좀 더 있으면 빨리 이동하거나, 이동하는 동안 쉬거나, 가는 대신 상대를 오게 해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한 사람에게 1년이면 365일, 하루면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진다는 건, 아마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바뀌지 않는 진실일 겁니다. 그렇게 지구 위에 생물로 태어난 모든 것들이 똑같은 길이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기분이 이상해져요. 과거, 현재, 미래 가운데 현재를 중시하는 하루살이 인간으로 살기 시작한 것도 어느 날 그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달아 버린 이후였거든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세상 무엇보다 공평한 하루. 이 하루 속에서 최대한 덜 후회하도록 집중해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고, 오늘도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나중 이야기고요.)(진짜예요)(변명 아닙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앨범 단위의 꼭 들어 봐야 할 작업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어요. 특히 최근으로 올수록 음악을 잘하는 음악가들은 영상이나 서브 콘텐츠들도 무조건 잘하는 ‘잘놈잘’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먼저 3PICKS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을 것 같아, 장기하가 만든 첫 솔로 정규 앨범[산산조각]의 33분짜리 뮤직비디오를 추천합니다. 영상을 먼저 만들고 노래를 다음에 만들었다는 후일담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실제로 영상을 한 번 쭉 보고 앨범을 들으면 감상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오늘의 에피타이저로 한 접시 먼저 하고 오시죠. 참, 포스터 첨부한 '올해의 헬로루키' 더 현대 서울 팝업스토어도 놓치지 마세요. 작지만 알찹니다. 9월 23일까지! 정말 몸을 다섯 개 정도로 쪼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심야 [도그마] (2026.09.09)
김심야는 뭐랄까, 조금 까다롭습니다. 한국 음악을 나름 너른 마음으로 꽤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도 ‘김심야 어때?’라고 물으면 ‘좋지, 좋긴 한데…’라는 애매한 반응이 자주 돌아오곤 했거든요. 장담컨대 앨범 [도그마]는 그렇게 지금까지 김심야의 음악이 도통 어려웠던 분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앨범입니다. 저도 양심이 있지, ‘일반적’으로 쉽게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낯설고 뾰족한 음악이 담긴 앨범이거든요. 다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랩을 대하는 김심야의 태도도, 불교에 바탕을 둔 일관적인 메시지도, 전자음악 레이블 사운드 서플라이 서비스(SoundSupply_Service)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음악도요. ‘Zulu Love’같은 곡을 먼저 들어보세요. ‘Experimental’의 참맛을 어렵지 않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참, 이쪽도 앨범 전반의 이야기를 담은 26분짜리 뮤직비디오가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우니 잊지 말고 꼭 살펴보세요.
아무리 독립선언을 했다고 해도, 10년이라는 시간을 단번에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 10년 동안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팝 아이콘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애와 상관없이 마치 고유명사 같던 ‘NCT 마크’에서 ‘마크 리’로 첫발을 내딛는 마크의 노래에는 별다른 꾸밈이 없습니다. 특별한 프로모션이 없었던 공개 타이밍도 그렇고, 음악과 뮤직비디오도 ‘맨얼굴’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그를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끼게 합니다. 공간감을 최대로 올린 심플한 악기 배열 속, 뜨거운 지난여름이 남기고 간 열기가 슬쩍 바람에 실려 옵니다. 이미 다 알았다고 생각한 사람의 처음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듭니다. 자꾸만 돌아보게 합니다.
이미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감사하게도 제가 이 앨범의 소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 기쁩니다. 처음 음악을 받아서 들은 순간, 어쩌면 제가 지난 10년 동안 CIFIKA에게 이런 음악을 기다려 온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Old Fantasy]는 지금까지 발표한 CIFIKA의 어떤 음악보다 감정과 개인에서 출발합니다. 겉보다 내면에 소리를 기울입니다. 덕분에 어쩐지 ‘범접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던 CIFIKA 음악의 개성이 익숙한 온도로 ‘성스럽게’ 체질을 바꿉니다. 늘 좀 더 강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그녀의 목소리를 중첩해 활용한 트랙들이 특히 좋습니다. 예를 들면 타이틀이기도 한 ‘HEX’ 같은 곡 말이죠. 앨범과 곡의 심상을 비주얼화 한 감독 meltmirror의 정교한 솜씨에는 늘 경탄할 뿐입니다. 두 예술가의 불꽃 튀는 승부를 볼 수 있는 뮤직비디오에요. 말씀 드렸죠? 요즘은 ‘잘놈잘’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