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에 쉽게 타협해 버리는, 닳고 닳은 어른 같잖아요.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까지 했던 모든 말과 모든 행위를 무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잖아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몸부림을 치고 발악하다가도 ‘어쩔 수 없다’ 카드가 등장하는 순간 상황은 전부 리셋됩니다. 눈앞에 ‘GAME OVER’가 뜨고,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라는 질문 아래 ‘YES / NO’만 남는 거죠. ‘어쩔 수 없다’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일요일 완벽히 ‘어쩔 수 없다’ 상태였습니다. 물론 앞서 얘기한 (negative)가 아닌 (positive)이긴 했어요. 제 인생 밴드 가운데 하나인 램프(lamp)의 공연이 있었거든요. 한국 공연은 7년 만이었고, 페스티벌 공연은 제 기억으로는 처음인데 혹시 아니라면 알려주세요. 올해 ‘아시안 팝 페스티벌’ 라인업에서 이름을 본 이후부터 ‘펜스를 잡겠다’라고 했던 호언장담은 현장 상황(음악 좋아하는 사람에게 페스티벌은 명절입니다, 아시죠? 지난 주말 반갑게 인사한 분들 모두 고마워요 사랑해요)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건 그대로 너무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리허설부터 조금 무너진 상태로 1시간 내내 행복이라는 커다란 트램펄린 위에서 방방 뛰는 아이처럼 공연을 즐겼습니다. 「さち子(Sachico)」는 정말 완벽한 노래에요… 페스티벌이 끝나고 좋은 기회로 기타의 소메야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좀 더 빨리 한국에 다시 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덕분에 오늘도 레터가 조금 늦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이 모두가 오로지 이 문장을 쓰기 위한 긴 빌드업이었나 생각하신다면, 저 그 정도로 용의주도한 사람 아닙니다. 다시 한번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열네 번째 픽서비스, 시작할게요.
백현진 [서울식: 낮 사이드 / 서울식: 밤 사이드] (2025.06.10)
실리카겔의 김한주가 소개 글에 쓴 ‘다소 도회적이면서도 어딘가 추잡한’만큼 백현진을 잘 소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995년부터 홍대 앞에서 공연을 해 온 사람. 음악가이면서 화가고, 배우이면서 서울 마포구에서 태어난 이 사람이 만들고 부르는 ‘서울’이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무려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낮’과 ‘밤’으로 동시에 내는 시도 역시 그런 밀도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가능할 겁니다. 수록곡 가운데 이미 라이브로 공개된 곡들이 많은데요, 라이브와 앨범에 실린 곡들의 질감이 꽤 다른 편입니다. 기회가 되면 라이브도 꼭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두 장 다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모과’나‘빛23’ 같은 ‘백현진식 가요’ 곡이 있어 편안한 ‘낮 사이드’를 먼저 추천해 봅니다.
뭔가 열심히 나오고는 있는데 뾰족하게 다가오는 그룹이나 앨범은 드물다는 게 저의 2025년 상반기 케이팝의 단상입니다. 묵묵하게 새 앨범들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어떤 방식이건 짜릿함을 전하는 경우는 드무네요. (사실 이 장르에서 그 짜릿함이 없다는 건 꽤 위기상황이죠.) 아일릿의 [bomb]은 그런 2025년 상반기풍 앨범이 되려다가는 곳곳에서 방향을 틀며 시선을 끕니다. 방향을 틀게 하는 힘의 원천은 – 아직은 희미하지만 확실히 뚜렷해진 팀 컬러고요. 타이틀 곡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는 그런 과도기에 탄생한 기묘한 타이틀입니다. 아일릿을 둘러싼 고민과 상념을 3분에 욱여넣었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FPM 음악을 한참 추억하게 만든 메인 프레이즈가 킥이었습니다.
‘사려 깊다’라는 말 참 좋지 않나요. 적당한 조도, 온도, 습도를 가진 공기에 온몸이 감싸 안겨 숨 쉬는 것만으로 배려받는 특별한 기분이 드는 표현이잖아요. 전진희의 [雨後 uuhu]는 그런 사려 깊은 음악가가 하나하나 짚어 내려간 소리로 가득한 앨범입니다. 건반을 누르려 다가가는 손가락의 속도, 가만히 상황을 보던 첼로가 비로소 곡의 문을 두드리는 타이밍, 단어마다 다른 목소리의 호흡 등 모든 면에서 만든 이의 섬세함이 묻어납니다. 깊은 고민의 시간이 절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올여름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쩐지 낭만적이고 싶은 여름밤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