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호기롭게 좋아하는 계절에 ‘장마’를 써넣었던 물고기자리 비 좋아 사람이지만, 요즘은 아무래도 다릅니다. 하루 종일 이동할 일이 있거나, 나가야 하는 순간부터 마침 장대처럼 퍼붓는 빗줄기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싶더라고요. 이상기후로 비 오는 방식이 달라지다 보니 여기저기 폭우 피해도 크고요. 무거운 마음 한편, 그래도 비가 와서 좋은 점 하나를 찾자면 평소보다 음악 듣기가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는 점입니다. 하루 종일 합법적으로 어둡고 차분한 기운이 맴도는 하늘 아래서 실내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음악을 처음 좋아하던 때나 찾아왔던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집중도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집니다.
워낙 비가 많이 온 지난주에는 집에서도, 집 밖에서도 비와 관련한 노래를 틀고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요. 그 가운데 오랜만에 이 노래에 꽂혀서 틈날 때마다 다시 들었습니다. 장혜진의 ‘우(雨)’에요. 1990년대 라디오 좀 들었다는 분들은 모를 수 없는 이 곡은 장혜진의 세 번째 앨범 [Before The Party]의 수록곡입니다. 타이틀 곡은 ‘내게로’였지만, ‘1994년 어느 늦은 밤’이라는 노래가 특별한 녹음 비하인드로 제일 인기가 많았죠. ‘1994년 어느 늦은 밤’ 대세론에서 저는 끝까지 ‘우(雨)’를 원톱으로 밀던 사람이었는데요, 그냥 들어보시면 압니다. 앨범 프로듀싱을 담당한 김현철 특유의 벨벳 같은 질감을 느끼는 데 이 노래만 한 곡이 없어요.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장혜진의 곡 소화력은 뭐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다시 생각해도 역시, [Before The Party] 원톱은 ‘우(雨)’입니다. 반박은 사절🤚
소유 (SOYOU) [PDA] (2025.07.16)
‘이거지!’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싱글입니다. 아마 그렇게 외친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컬리스트 소유가 가진 가능성에 계속 관심을 두던 사람이었는데요, 힘이나 기술도 좋지만, 무엇보다 목소리로 무드(mood)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탁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정기고와 함께 부른 ‘썸’에서 사랑받은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요. 시스타와 ‘썸’ 이후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본 결과 너무나 멋진 합의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노래뿐만이 아닌 소유의 ‘스트릿’ 한 매력을 잘 포착한 뮤직비디오와 요즘 국내에서 잘한다는 입소문이 난 프로듀서들 이름이 빼곡한 크레딧도 놓치지 마세요.
라디오로 듣는 90년대 한국 가요에 엄청난 수혜를 받고 자란 저로서는 ‘이런 걸’ 늘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이렇게 미련할 정도로 순도 높게 ‘그 시절’을 재현한 앨범이 또 있었던가요. 아니 사실 이 정도면, 또 권순관이라는 사람이라면 재현이라는 말도 실례. 그냥 ‘그 시절 그 자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두말할 필요 없이 3분도 길다는 시대 무려 6분 26초를 택한 ‘여행자’를 한 번 들어보세요. 이 오케스트라, 이 벅차오름. 저와 비슷한 마음의 빚을 지고 사는 분들이라면 이 뚝심이 반갑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이찬혁은 아무튼 좀 범상치 않은 사람입니다. ‘범상치 않다’가 정말 딱 맞습니다. 이 사람의 행보를 보며 종종 물음표를 띄우다가도, 음악을 들으면 그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거든요. AKMU가 아닌 이찬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는 평이 많던 첫 정규 앨범 [ERROR](2022) 이후 3년여 만에 발표하는 2집 [EROS]는 여전히 이찬혁이면서도 이 사람의 범상치 않음이 어쩔 수 없이 더 궁금해지는 앨범입니다. 이 사람에게 죽음이란 뭘까, 이런 멜로디와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그런 저 같은 사람을 위해‘영감의 샘터’ 같은 팝업을 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호기심에 불을 지피는데 이찬혁 풍 가스펠이라 해도 좋을 첫 곡 ‘SINNY SINNY’만큼 흥미로운 시작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